산행기/충청남도

선달산&박달령 늦가을 산행

깃틸 2008. 11. 9. 16:15

 

 

                        부석사 단풍

 

                           인삼밭

선달산&박달령 늦가을 산 

2008. 11.8.

위치 경북 영주시, 봉화군 춘양, 강원도 영월군= 경북과 강원도 경계 백두대간

함께한 이 지리사랑 백두대간 종주대원

코스 부석사-봉황산(818.9m)-갈곶산(966m)-선달산(1236m)-박달령-1105봉-옥돌봉(1242m)-도래기재(770m),거리및소요시간 약15km, 5시간40분

  

◯ 산행시간

11:33 부석사 입구 출발,11:49 부석사 무량수전

11:56 석조여래좌상,12:23 봉황산 삼각점, 정상석 없음

12::29 헬기장 ,12:55 갈곶산,13:05 늦은목이 0.5km 구조목

13:11 늦은목이,13:28 선달산 0.9km 구조목

14:08 선달산 정상, 삼각점

14:10 박달령 5km구조목, 14:21 1246봉이라는 표시가 붙어있는 무명봉 전망대

14:29 선달산 옹달샘 이정표,14:20 전망대,15:07 박달령 1.4km 구조목

15:24 박달령,15:27 박달령 샘,16:23 문수기맥분기점, 박달령과 주실령 이정표

16:30 옥돌봉,16:31 도래기재 2.68km 구조목

16:39 수령 550년 철쭉나무,17:01 진달래터널,17:13 도래기재

  

◯ 부석사무량수전

1962.12.20 국보 제18호 지정 부석사무량수전(浮石寺無量壽殿) 1동

소재지: 경북 영주시 부석면 북지리 148

부석사 시 대 고려시대

 

봉황산 중턱에 있는 부석사는 신라 문무왕 16년(676)에 의상대사가 왕명을 받들어 화엄의 큰 가르침을 펴던 곳이다. 『삼국유사』에 있는 설화를 보면, 의상대사가 당나라에서 유학을 마치고 귀국할 때 그를 흠모한 여인 선묘가 용으로 변해 이곳까지 따라와서 줄곧 의상대사를 보호하면서 절을 지을 수 있게 도왔다고 한다.

 

 이곳에 숨어 있던 도적떼를 선묘가 바위로 변해 날려 물리친 후 무량수전 뒤에 내려 앉았다고 전한다. 그래서인지 무량수전 뒤에는 ‘부석(浮石)’이라고 새겨져 있는 바위가 있다.

 

무량수전은 부석사의 중심건물로 극락정토를 상징하는 아미타여래불상을 모시고 있다. 신라 문무왕(재위 661∼681) 때 짓고 고려 현종(재위 1009∼1031) 때 고쳐 지었으나, 공민왕 7년(1358)에 불에 타 버렸다. 지금 있는 건물은 고려 우왕 2년(1376)에 다시 짓고 광해군 때 새로 단청한 것으로, 1916년에 해체·수리 공사를 하였다.

 

규모는 앞면 5칸·옆면 3칸으로 지붕은 옆면이 여덟 팔(八)자 모양인 팔작지붕으로 꾸몄다. 지붕 처마를 받치기 위해 장식한 구조를 간결한 형태로 기둥 위에만 짜올린 주심포 양식이다. 특히 세부 수법이 후세의 건물에서 볼 수 있는 장식적인 요소가 적어 주심포 양식의 기본 수법을 가장 잘 남기고 있는 대표적인 건물로 평가 받고 있다. 건물 안에는 다른 불전과 달리 불전의 옆면에 불상을 모시고 있는 것이 특징이다.

   

무량수전은 우리 나라에 남아 있는 목조 건물 중 봉정사 극락전(국보 제15호)과 더불어 오래된 건물로서 고대 사찰건축의 구조를 연구하는데 매우 중요한 건물이 되고 있다.

 

무량수전< 無量壽殿 >은 부석사< 浮石寺 >의 본전< 本殿 >으로서 신라< 新羅 > 문무왕< 文武王 >(661∼681) 때 의상대사< 義湘大師 >가 창건< 創建 >한 것이다. 그후 소실< 燒失 >된 것을 고려< 高麗 > 현종< 顯宗 >(1009∼1031) 때 중창< 重創 >하였으나 공민왕< 恭愍王 > 7년(1358) 다시 불에 타 버려 우왕< 禑王 > 2년(1376)에 재건< 再建 >하였고 조선< 朝鮮 > 광해군< 光海君 >(1608∼1623) 연간< 年間 >에 단청< 丹靑 >하였다. 이 건물은 주두< 柱頭 >와 소로< 小累 >의 굽은 각각 약간 안으로 깎여 흰 곡선< 曲線 >을 이루고, 굽받침이 있는 것이 특징이다.

 

모든 가구< 架構 >는 직선재< 直線材 >를 사용하였고 장식적< 裝飾的 >인 요소< 要素 >가 적으며 공포< 공包 >, 가구< 架構 >의 수법< 手法 >도 견실< 堅實 >하다. 1916년 해체수리시< 解體修理時 >에 발견된 묵서명< 墨書銘 >에 우왕 2년(1376)에 재건된 것으로 기록되어 있으나 구조양식< 構造樣式 > 중 가장 오래된 것 중의 하나로서 주심포< 柱心包 >양식의 기본수법을 잘 남기고 있는 대표적인 건물이 하나이다.

 

전내< 殿內 >에는 무량수불< 無量壽佛 >인 아미타여래< 阿彌陀如來 >를 봉안< 奉安 >하였는데 다른 불전에서와는 달리 불전 측면< 側面 >에 모시고 있으며 조사당< 祖師堂 >의 벽화< 壁畵 >를 옮겨 보존< 保存 >하고 있다. (출처:인터넷)

  

 

 

 

 

   

 

                      부석이라 글이 새겨진 바위

 

◯ 박달재

필자도 처음에는 백두대간에 있는 발달재가 대중가요 ‘울고넘는박달재’로 알고 있었으나 이번에 알게 되었다. 천등산 박달재는 해발 453m 충북제천에 있는 고개길로 박달도령과 금봉낭자의 애닯은 사랑이 전해져오는 곳이며 대중가요 울고 넘는 박달재의 소재로도 잘 알려져 있는 ."박달재의 원이름은 천등산과 지등산의 영마루라는 이등령이었으나 조선중엽 경상도의 젊은 선비 박달과 이곳의 어여뿐 낭자금봉의 애닯은 사랑의 전설이 회자되면서 박달재로 불리우게 되었다.

  

장원의 부푼 꿈을 안고 한양으로 가던 박달은 고개아래 촌가에서 하룻밤 유하려다

길손을 맞이하는 금봉의 순수하고 청초한 모습에 정신을 빼앗기고 금봉도 박달의 준수

하고 늠름한 모습에 잠을 못이루고 달밤을 거닐다가 역시 금봉을 그리면서 서성이던

박달을 만나 사랑을 나누게 되었다.

 

몇날을 머물며 금봉과 사랑을 속삭이던 박달은 과거에 급제한후에 혼인을 하기로 언약

하고 과거를 보러 한양으로 떠나고 그 날부터 금봉이는 박달의 장원급제를 서낭님께

빌었으나 과거가 끝나고도 박달의 소식이 없다 크게 상심하여 고개를 오르내리며 박달

의 이름을 애타게 부르다가 한을 품고 삶을 거두고 말았다.

 

한양에 온 박달도 과거준비는 잊은채 금봉을 그리는 시만 읊다가 낙방을 한 후 금봉을

보기가 두려워 차일피일 미루다 금봉의 장레 사흘후 되돌아와 금봉이 죽었다는 말을

듣고 땅을 치며 목놓아 울다가 언듯 고개를 오르는 금봉의 환상을 보고 뒤 쫓아가서

와락 금봉을 끌어 안았으나 금봉의 모습은 사라지고 박달은 낭떠러지에 떨어져 죽고

말았다. 이후 사람들은 이등령을 박달재라 부르게 되었다.(인터넷자료)

 

◯ 선달산(先達山)

선달산은 백두대간의 소백산과 태백산 즉 이백 사이에 솟아 있어 대간을 조망하기에 좋은 산이다. 정상에서는 동쪽으로 남대천과 어래산이 보이고 서쪽으로는 박달령이 보인다. 또한 남쪽의 갈곶산과 이어진 부드러운 구릉으로 산행하기 수월하다. 소수서원은 1532년 주세붕이 세운 우리나라 최초의 서원으로 창건 당시 백운동서원으로 불리다가 명종 때 풍기군수로 있던 이황의 건의로 소수서원이라 불렀다.

 

경상북도 봉화군은 사방이 산으로 첩첩이 둘러싸여 있고 그 속에 오전, 두내, 다덕 등 전국에서 손꼽히는 약수가 여러 군데 있다. 그 중 으뜸인 오전약수는 서쪽으로 마구령과 동쪽으로 도래기재 사이의 선달산 아래 있으며, 물맛이 가장 좋기로 조선시대 최고의 약수로 뽑히기도 했다. 그리고 중종 때의 풍기 군수 주세붕은 오전약수를 마음의 병을 고치는 좋은 스승에 비길만하다고 극찬했다.

 

약수터 앞 음식점이 들어선 곳을 제외하고는 한가로운 농촌 마을이다. 그러나 오전약수터 주변은 주말과 단풍철이 되면 관광차와 사람들로 부산스럽다. 또한 선달산은 아름다운 계곡을 품고 있으며 각종 나무가 아름답게 줄을 서 있어 산세도 우아하다. 영월군 하동면 내리 지동마을에서부터 시작되는 내리천 계곡은 초입에서부터 울창한 수림과 풍부한 수량이 마치 원시의 비경을 연상케 한다.

 

계곡을 거슬러 오를수록 점입가경의 계곡미가 펼쳐지는데 한가지 흠이라면 이곳의 상류가 석회암 지대인지라 계곡 바닥이 온통 석회석으로 덮혀 물을 마실 수가 없다. 그러나 늪다리에 이르러 칠룡동 계곡으로 들어서면 계곡물은 옥같이 맑고 폭포,소 등이 연이어 그야말로 심산유곡이 펼쳐진다.

 

◯ 도래기재 유래

도래기재는 서벽리 북서쪽 2km거리에 마을 이름을 따와서 도래기라 부른다. 도래기마을에는 조선시대에 역이 있었기에 역촌마을이라 하여 도역리라 부르다가 이것이 변음이 되어 도래기재로 통용되었다. 또 재넘어 우구치는 골짜기 모양이 소의 입모양이라 하여 우구치라 불린다.(영주국유림관리소)

 

◯ 산행기

처음에 백두대간을 하는 산악회를 따라 강원도 등지를 부산발 밤 10-11시 출발하여 새벽3-4시에 대간을 시작하여 어둠속에 절반가량을 걷다보면 의미가 없어 그 구역 볼거리를 최대한 보면서 즐기고 유익한 산행을 하기 위해 기회를 보면서 10여년 새월 백두대간을 가고 있다.

 

오늘도 부석사와 단풍이 어우러진 모습과 오전지의 가을풍경 박달령의 생생한 모습 그리고 야생식물을 관찰하며 선달산을 간다. 지리사랑 대간팀이 만차를 이룬 가운데 휴게소에서 한 번 쉬고 큰골입구에 모두 하차하고 4명이 부석사에 도착한다. 부석사 입구 가로수 벚나무 등 활엽수에 오색홍엽이 한 폭 그림을 연상케 할 정도로 아름답다.

 

부석사 주차장을 지나 분수연못은 인공폭포와 물보라 그리고 주변 단풍이 어우려져 아름답고 매표소(입장료1200원)부터 단풍나무와 은행나무 단풍이 곱게 물들어 있고 낙옆이 한잎두잎 떨어져 도로를 수놓고 있다. 각지에서 몰려든 여행객들도 많고 산사의 아늑한 분위기와 주변 단풍이 한폭의 동양화다.

 

부석사 경내를 한바퀴 돌아보고 무량수전 뒤 浮石 글귀가 새겨진 것을 확인하고 석조여

래좌상 건물 좌측으로 등로에 올라선다. 이곳 국보를 보전하기 위해 일대를 철조망으로 출입을 금하고 있지만 철조망이 낡고 넘어져 등산객들이 많이 지나간 모습이다.

 

우리 일행은 부석사 입구 상인에게 부석사 뒤로 등로가 있느냐고 여쭈었더니 지키고 있어 갈 수 없다고 하였지만 필자는 백두대간 코스 중 강원도지역에 금번 산불로 통제구역이 다소 있지만 경북지역 등 국립공원은 11.15일부터 산불방지 통제를 하기 때문에 평상시데로 출입이 될 것이라고 하면서 봉황산에 올라선다.

  

봉황산을 내러서니 죽터마을방향으로 구름이 벗겨지면서 가시거리가 좋아지고 단풍이 물든 산능선을 바라보며 갈곶산 못미쳐 큰골에서 시작한 일행들이 등로가 없는 길을 낙옆에 미끄러지면서 올라와 부석사에서 오른 우리와 만나 갈곶산 정상에서 휴식을 취한다.

 

16분을 내러서 오전리 생달마을과 남대리 주막거리를 내려가는 늦은목이 고개에 네러서 다시 선달산으로 오른다. 국립공원영주관리소에서 나무에 이름표를 달고 표지기와 휴식시설을 설치하고 500m간격으로 구조목 번호를 세워 관심을 많이 쏟은 흔적이 엿보이고 조림한 편백나무잎이 노랗게 물든 풍광에 시선이 자주 간다.

 

16분을 내러서 오전리 생달마을과 남대리 주막거리를 내려가는 늦은목이 고개에 네러서 다시 선달산으로 오른다. 국립공원영주관리소에서 나무에 이름표를 달고 표지기와 휴식시설을 설치하고 500m간격으로 구조목 번호를 세워 관심을 많이 쏟은 흔적이 엿보이고 조림한 편백나무잎이 노랗게 물든 풍광에 시선이 자주 간다.

 

대간능선 사이로 오전저수지 푸른물을 보면서 간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정도로 바라보며 간다. 1시간 정도 올라 선달산 정상에 서니 가야할 백두대간의 능선이 파노라마처럼 펼쳐지고 조망이 으뜸이다. 왕바우골로 내러가는 1246봉을 지나 박달령에 이른다. 박달령 헬기장과 쉼터 그리고 산신각 등산로안내도가 있고 임도가 지나가고 있으며 50m아래에 박달령샘터가 있는데 수량이 작지만 물이 차갑다.

 

박달령에서 오전약수로 내러가는 임도를 건너 능선을 올라 주실령가는 이정표 지점을 지나 옥돌봉에 올라선다. 옥돌봉은 전망이 좋아 산림청에서 전망도를 세어놓고 있다. 자동 증명사진을 남기고 도래기재로 내러선다. 국립공원에서 조성한 낮은 돌계단에 낙옆이 쌓여 조심스럽게 내러가지 않으면 발목을 삐일 가능성이 높아 스틱을 사용하여 조심스럽게 내러서니 수령이 550년 된 철쭉보호수가 나온다.

 

철쭉보호수를 둘러보고 진달래터널을 지나 동물이동로 옆 나무계단으로 도래기재에 하산하여 몸 단장을 끝내고 남은 베냥에 남은 과일을 정리하고 나니 어둠이 내려 앉기 시작하고 나무계단위에서 불빛을 밝힌 일행들이 하나둘 내러선다. 터널입구에서 차를 기다리고 있으니 구룡산 방향 산에서 불빛이 보이더니 산꾼2명이 내러와 어디서 오느냐고 여쭈었더니 희방재에서 오전 5시에 출발하여 12시간 30분 소요되었다 한다.

 

산행시작 전에 희방재에서 만난 승용차를 각각 들머리 지점에 세워 놓고 산행 하산 후 교통 수단이 좋은 지점까지 교환하도록 하는 방법을 사용한다며 주차하여 놓은 승용차를 운전하여 사라진다. 17:40분경 이고개를 다니는 마을버스가 지나가더니 18:10경 다니 되돌아 가고 있다. 언제가 저 버스를 이용하여 이곳을 와야 할지 몰라 유심히 바라본다.

 

◯ 에폘로그

오늘은 이동하는 시간동안 옆자리 해운대 신시가지에 거주하는 고재용씨와 많은 이야기를 나누었다. 누구의 말이던가 산꾼은 산에서 만난다고 말이다. 고재용씨는 1대간9정맥을 마치고 지금 전국 지맥을 종주하고 있는데 문수지맥을 하지 못하여 마음속에 담고 있던 터에 마침 지리사랑 백두대간 구간 옥돌봉 산행계획을 알고 이 차편을 이용하여 문수지맥을 단독으로 하기 위해 나섰다는 것이다.

 

옥돌봉에서 시작하는 문수지맥은 주실령을 지나 문수산(1205m)를 정점으로 예배령으로 내러 앉는 지맥이다. 몇 해 전에 백두대간하면서 눈이 허리까지 쌓인 곳이 있어 기어갈 정도라 이 구간을 포기하고 박달재로 하산한 기억이 있다고 한다.

 

고재용씨에 대해서 들은데로 잠깐 몇마디 올린다. 이분은 체육교사를 하고 있는데 부친도 산을 좋아하였고 어린 때부터 달리기와 마라톤을 좋아 하였고 산악마라톤을 하기도 하였으며 매일 아침 장산을 구보로 체력을 유지하고 있다고 한다.

 

정맥과 지맥 이야기를 하다가 중요 봉오리마다 “준▪희”패말이 나무에 걸러 있어 이분은 맥을 하면서 어떻게 공신력이 요구되는 패말을 알고 붙였을까? 처음 답사 전에 산에 대해서 정확한 지리를 알고 이름과 높이의 패말을 미리 제작하여 가지고 다니면서 정확한 독도법을 사용하였을까? 그렇치 않으면 2차 종주를 하면서 걸었을까? 2차 종주를 하면서 걸었다면 대단하기 짝이 없다.

 

그런데 오늘 그 궁금점이 어느 정도 풀렸다. 이 분은 건건산악회 전 회장을 한 분인데 연세도 지긋하시고 산꾼들이 1대간 9정맥도 평생을 바쳐야 한 번하기 힘든데 전국 단맥 이상 약 841개와 중 지맥이 138개 되데 1대간9정맥은 물론 많은 지맥을 완주하고 요즘은 요즘도 주요봉에 패찰을 붙이려 다닌다고 하니 정말 대단하다.

 

그리고 산에 다니면서 혹시 뱀에게 물리면 응급처치를 하기 위해 부항을 하나 준비하여 다니는 것이 좋다고 한다. 물린 부분에 즉시 부항을 뜨서 독을 빨아내고 병원으로 응급히 가면 생명을 구할 수 있다는 것이다.

 

 “맨발 산꾼”이라면 부산지역에서는 모르는 산꾼이 없을 정도인데 이분은 교사로 퇴임을 하고 맨발로 전국산을 다니면서 시거널도 붙이고 “맨발등산건강법”을 소개하여 왔는데 무릎에 염증 물이 찼을 때에 물을 뺀 후 “닭발소주탕”을 복용하면 효능이 좋다고 한다.

 

닭발 1관에 소주 3되 정도 넣고 중탕을 하여 포장한 후 먹으면 된다는 것이다. 고재용씨도 무릎에 물이차서 좋은 효능을 보고 있다고 한다. 중탕은 먹고 난 사람 옆에 앉아 있으니 술 냄세가 솔솔 느껴진다.

 

선달산 구간을 하면서 이 구간 어딘가에 있다는 봉이 김선달 묘소를 참배할 생각이었으나 정확한 위치를 몰라 허탕만 쳤다. 등산을 즐겁고 유익하게 하여줄 정보가 부족 한 것을 느끼면서 여러분 산에 갈 때 많은 정보를 알고 가기를 바랍니다.

 

  

  

 

  

   

   

 

                            수령 550년 철쭉나무

 

  도래기재 동물이동로.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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