산행기/충청남도

용봉산

깃틸 2009. 10. 21. 10:02

용봉산 답사 

2009.10.20. (화)

위치 충남 홍성군 상하리, 봉신리

함께한이 우보산악회원 산넘고능선따라외 32명

코스 용봉초등학교-미륵암-전망대-용봉산(381m)-노적봉(345m)-악귀봉(369m)-절고개-용바위-315봉-병풍바위-구룡대-주차장

산행시간및거리 2시간30분 약6km

 

산행일정

09:30 부산출발, 13:50 용봉초등학교 도착, 13:50-14:20 점심, 14:20 산행시작, 14:44 미륵암, 14:55 전망대, 15:06 119구조목 용도사-5,15:09 돌탑, 15:11 투석봉(350m)

15:21 용봉산(381m), 15:35 노적봉갈림길,15:38 사자바위, 15:46 노적봉

15:55 산성흔적돌답길, 16:11 악귀봉(369m), 16:12 다리,16:25 절고개

16:30 무명봉 갈림길,16:33 용바위,16:45 병풍바위, 16:51 거북이돌탑

16:58 구룡대, 15:00 용봉산자연휴양림 구용대관리소, 15:05 주차장

 

    

<<용봉산 유래>> 유래비 참고

73년 가야산(678m), 덕숭산(495m) 용봉산 일대를 덕산도립공원으로 지정되었다. 덕산 온천은 알칼리성으로 규산 나트륨, 칼슘, 마그네슘이온 등이 함유되어 소화기질병 피부병 등에 효과가 있다고 알려져 있다. 조선시대 이율곡 선생도 효능이 탁월하다고 언급하였다 한다.

 

용봉산은 고려시대에는 북산, 조선시대에는 팔봉산으로 불렀다. 일제시대에 용봉사의 절 이름을 따서 용봉산으로 붙여졌다고 전한다. 산의 형상이 용의 몸집에 봉황의 머리를 닮았다하여 용봉산이라고 불리워지고 있다.

 

⊙ 산행기

  백제의 군사 훈련장으로 이용되기도 하였다는 수덕사, "수덕사의 여승" 대중가요 가사가 심금을 울리기에 충분하여 그리던 용봉산, 수덕사 산행 기회가 왔다. 부산에서 버스로 4시간 정도 소요하여 용봉초등학교 앞에 도착하니 운동장 옆 은행나무 잎이 노랗게 물들어 가고 학교뒤로 용봉산이 병풍처럼 둘러져 있고 정문 앞에 벼를 말리고 있는 풍경이 전형적인 시골 모습이다.

 

용봉산은 최영장군의 활터와 금마총이 있고 얼이 서린 곳이라고 한다. 들머리는 청소년수련원, 구룡대매표소, 용봉사가 있지만 종주개념으로 초등학교 좌측 담장 옆을 돌아 작은 포장로를 따라가니 등산로 이정표가 보인다. 미륵암으로 올라 큰 돌부처님을 뵙고 우측 등산로를 따라 안부에 올라 우측 등산로 따라 벼가 누럭게 익어가는 벌판과 홍성읍내를 내러다 보면서 정자를 지나간다.

 

등산로에는 소나무들이 작아 조망이 좋은데 그늘이 없어 햇볕을 바로 받으며 얼마간 올라 돌탑을 지나 투석봉에 올라선다. 정상이 지척이고 정상 우측으로 이어진 암릉능선따라 8각정자 아래 주차장이 내러다 보인다. 투석봉을 약간 내러 다시 용봉산에 올라서니 한자로 새긴 정상석이 우뚝 솟아 있다. 정상석에서 일행들 기념촬영을 하고 조금 내러서니 최영장군 활터와 팔각정자로 해서 주차장으로 내러가는 길과 노적봉 갈림길이 나온다. 노적봉 방향으로 내러 야외식탁을 지나 사자바위에 올라 조망을 즐기고 기암괴석을 보면서 노적봉에 올라선다.

 

장기사와 김기사에게 악귀봉 가는 능선에 있는 많은 기암괴석들을  배경으로 포즈를 취하며 오르내러 시간 가는 줄 모르고 절고개에 내러선다. 김기사는 마애불을 촬영하기 위해 내러가고 용바위를 향해 산성돌길을 올라 무명봉에서 좌측 능선을 올라서니 이정표에 용바위를 알리고 있지만 바위는 용의 모습은 찾을 수 없다. 우측능선 계단으로 가파르게 내러서니 315봉과 275봉 병풍바위에서 지나온 능선의 조망을 즐긴다.

 

병풍바위 아래에 용봉사는 추색으로 변하여 가는 가을 정취속에 고요하고 해는 뉘억뉘억 서산으로 향한다. 거북돌탑2기를 내러 구룡대와 용봉사 갈림 이정표 아래 산행안내도를 보고 산행발자취를 되새기고 주차장 대기 버스에 올라 수덕사로 향한다. 22분 이동하여 넓은 수덕사주차장에 도착하여 기념품판매점과 음식점이 있는 곳을 지나 새로 세운 일주문을 들어가 수덕사를 30분 관람하고 주차장에서 뒷풀이 후 어둠이 내린 조용한 수덕사를 뒤로하고 흐뭇함을 가득 머금고 부산으로 향하는 차안에는 "수덕사의 여승" 가사가 애절하게 흘려 나온다.(19:00)   

 

⊙ 에펠로그

용봉산은 낮지만 옹골차고 기암괴석들 전시장이며 조망까지 좋아 즐거움을 더하여 가족산행지로 추천하고 싶다. 거리에 비하여 기암괴석을 오르내려 다소 시간이 소요된다. 절고개에서 약450m 아래 마애불을 답사하고 원위치 하여 용바위와 병풍바위를 구경하고 용봉사로 해서하산을 하는 것이 좋을 것 같다. 부산과 경남지방에서는 접근하는데 많은 시간이 걸려 찾기가 쉽지 않은 산이지만 중부지방에서는 쉽게 찾아 볼 수 있으리라 생각된다.

  

>>> 수덕사의 유래

<"수덕사의 여승"에 얽힌 일화> ((펌글)) 

수덕사의 여승 - 송춘희
인적 없는 수덕사에 밤은 깊은데
흐느끼는 여승의 외로운 그림자
속세에 두고온 님 잊을 길 없어
법당에 촛불 켜고 홀로 울적에
아 ~ ~ 수덕사에 쇠북이 운다
산길 백리 수덕사에 밤은 깊은데
염불하는 여승의 외로운 그림자
속세에 맺은 사랑 잊을 길 없어
법당에 촛불 켜고 홀로 울적에
아 ~ ~ 수덕사에 쇠북이 
..
<"수덕사의 여승"에 얽힌 일화>
.. 
60년대 중반 발표되어 꽤나 힛트한 대표적 대중가요다.
속세에 두고 온 애절한 사연을 잊지
못해 흐느끼는 비구니가 그려지는 조금은 단조로운 가사내용이다.

그런데, 당대의 사람들은 이 애절한 비구니의 사연을 어떻게 받아들였기에
그처럼 큰 반향 을 일으키며 힛트할 수 있었을까? 그런 애절한 사연이 있을법한 수덕사 여승의 실제 모델은 있었을까? 있었다면 그는 누구일까? 이야기는 암울했던 일제 강점기 때,
시대를 앞서간 신여성 세분이 있었으니, 우리나라 최초 의 대중가요로
불리는“사의 찬미”로 너무나 유명한 윤심덕이
그 한명이요, 또한 우리나라 최초의 여류화가이며 문장가인 나혜석이
그 한명이고, 나머지 한명은 시인으로 유명한 김일 엽이다.

이 신여성 세 사람은 조선사회 남존여비의 실체가 그대로 존재했던
시기에 시대의 요구를 단 호히 거부하고 불꽃처럼 살며 사랑을 위해 목숨을 건 여인들이다.
나혜석은 사랑에 버림을 받고, 윤심덕은 현해탄에서 사랑과 함께 했으며,
김일엽은 스스로 사랑을 버린 여자다.
윤심덕과 나혜석의 이야기는 다음기회에 더 하기로 하고
여기선 실제로 수덕사의 여승이었으 며 한국 비구니계의
거목으로 추앙받는 김일엽의 이야기를 해보자. 김일엽의 본명은 “김원주”다.
일엽(一葉)이란 필명은 춘원 이광수가 그녀의 아름다운 필체에 반해 지어준 이름이다.
그런 사연 때문인지 둘 사이의 스켄들이 장안의 화제가 되기도 했으며
연애대장이라는 별명 을 들을정도로 자유 분망하게 살아갔으며
진취적인 자신의 삶을 여성운동으로 승화시켜 “자 유연애론”과 “신정조론”을 주장하게 된다.
그녀가 80몇년전에 주장했던 신 정조론을 살펴보자.
“남녀가 서로 사랑을 나누었다는 것이 문제될 것은 없다.
정신적으로, 남성이라는 그림자 가 완전히 사라져버린
여인이라면 언제나 처녀로 재생할 수 있는 것이다.
그런 여인을 인정 할 수 있는 남자라야 새 생활을
창조할 수 있다는 것을 강조하는 여인,
그것이 바로 나 다.” 한마디로, 남녀가 나누는 육체적 사랑을 순결
또는 정조로 표현하는 것 자체가 무의미 하다 는 이야기다.
당시 꽤 파격적인 주장으로 받아 들여졌지만
작금의 세태에 비추어 보더라도 앞서가는 신세 대의 사고방식이라 하지 않을 수 없다.

당시 모든 여성들이 그러했듯이
그녀도 극심했던 남존여비(지금도 그러하지만)라는 잘못된
인습의 피해자 일 수밖에 없는 현실을 몸소 겪었다.
부모의 중매로 얼굴 한번 본 적 없는 남자와의 결혼하는데
남자가 의족을 한 장애인 이었 다.
남자가 이 사실을 숨겼으므로 지금이라면 사기 결혼을 당한 셈이다.
신뢰에 기반 하지 못한 결혼생활은 일찌감치 청산할 수밖에 없었다.
이후 그녀의 생활은 더 더욱 자유 분망하 고 사랑하며 살아가게 된다.

김일엽은 한국최초 여자유학생으로 일본으로 유학하게 되는데
여기서 또 일본인 “오다 세이 조”와 운명적 사랑을 하게 된다.
오다 세이조는 아버지를 은행총재로 둔 일본최고 명문가의 아들이며
당시 규수제국대학생 이 였다.
남자 부모님의 반대로 결혼하지 못하고 헤어지는 아픔을 겪는데,
이때 둘 사이에 아들 이 하나 태어난다.
이 아들은 아버지 친구의 양자로 입적되어 자라나게 되며
이 사람이 한국 과 일본에서 인정받는 유명한 동양화가 일당스님이며 이름이 “김태신”이다.
일당스님은 지금도 김천의 직지사에서 활동 중이며 해방직후
김일성의 초상화를 그렸는데 김 일성 종합대학에 지금도 걸려있다 한다.

당시 그 일로해서 조총련계로 오해받아 작품 활동 에 고초를 겪기도 했다.
오다 세이조와의 사랑도 아픔으로 겪은 그녀는 곧, 일본에서 돌아와 수덕사의 여승이 된다.
자신이 추구하는 사랑이 세파에 으스러지는 아픔을 이겨내고,
또 다른 참 인생의 행로를 불 자의 길로 선택한 것이다.
어머니가 보고 싶어 어린 아들이 수덕사를 찾아 왔는데 불자가 되였으니,
“속세에 맺어진 너와나의 모자인연은 속세에서 끝났으므로
더 이상 나를 어머니라 부르지 말라” 하며 모질게도 모자의 정을 끊고자
이역만리 찾아온 어린자식을 절 밖에 재웠다 한 다.

이때 김일엽의 절친한 친구인 나혜석이 수덕사 밖에 있는
수덕여관에서 같이 지내며 어머니 처럼 자신의 젖가슴도
만져보게 하고 그림도 가르쳤다고 한다.
그때 흘리지 못한 눈물이 가 슴에 쌓여 해탈로 녹아내렸을까?

비구니로써 그의 인생이 한국 불교계에 큰 족적을 남길 만큼 성공적인 것은 우연이 절대 아니다.
가수이자 음성포교사인 “수덕사의 여승”의 주인공 송춘희씨를
기념하기위하여 절 앞에 있 는 주차장에 노래 기념비를 세웠으나
2-3일후 수덕사의 스님들이 이 기념비를 무너뜨렸다고 한다.

그 연유는 아마도 노래의 가사 내용이 스님들의 비위에 맞지 않았나 싶다.
그렇다 해도 중생을 구제하고 아픔을 함께 해야하는
스님들께서 속세의 작은 정표하나 가슴 으로 안아주지
못하는 처사가 못내 아쉽기만 한 것은 내가 불자가 아니어서 그런걸까?
일엽 스님께서 살아계셨다면 기념비는 어찌 되였을지 자못 궁금하기만 하다.

무심히 부르고 흘러버릴 대중가요일 뿐인
“수덕사의 여승”에 이렇게 딴지를 걸어 보는건,
이 노래가 만들어진 시기가 60년대이니 이때엔 일엽스님께서 수덕사에 살아 계실 때다.
단정할 수는 없으나 노랫말을 쓴이가 일엽스님의 인생을 안다면 아마도
그런 가사가 나왔음 직 하지 않은가.
이 글에 인용된 사실적 기록들은 일엽 스님의
아들 일당스님(김태신)이 최근 발표한 자전소 설
<어머니 당신이 그립습니다.>에서 발췌했음을 밝혀둔다.

 

⊙ 이미지 감상

 

 

  미륵불

 

  

 

개구리가 앉아 하늘을 보고 울어대는 것 같다.

 

  무슨 새 같은데?

 

 

 

    용바위

   새로 세운 일주문

 

 

등산지도  

여기까지입니다. 벌써 10월이 저물어 가고 있습니다. 깊어가는 가을 정취를 만끽하시고 행복하시기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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