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살등 신동대굴
선리 느티나무집에서 출발
달마야놀자 촬영지 이정표 지나 오른다.
산죽사이로 보이는 신동대굴에 도착합니다.
자칫 산죽 사이로 앞만 보고 가다보면 놓치기 쉬운 신 동대굴
움막이 하나 있고..
929봉 서쪽 사면에는 빨치산 지휘본부로 사용되었다는 심종지굴(신동대굴) 그리고 그앞에 신(심)동대굴이라며 신동대라는 사람의 행적을 적어 놓았습니다.
그러면 신동대에 대해서 자료를 인용합니다.
양산시 원동면 장선리 신불산 중턱에 신동대 굴이 있으니 약 400여 년 전 신동대란 사람이 살고 있었다고 한다.
그는 신불산 중턱에 있는 천연석굴에서 술수 공부를 연마한 후 끝내 도통하여 신비한 행적이 많았으나 그 중에도 특히 축지법에 능하여 하루저녁에 한양을 오고 갔다 한다.
그러다 자신의 실력에 심취한 나머지 사악한 마음에 눈이 멀어 나쁜쪽으로 그 술수를 사용하기 시작했다.
신동대는 특히 궁녀를 탐하여 희롱하거나 겁탈까지 하는 악행을 계속해서 저질렀고 이에 나라에서는 궁녀들의 몸에 명주 끈을 매어 두었다가 이 명주 끈을 단서로 신동대가 있는 곳을 탐지하여 잡아 오라 하면 중국으로 하루 저녁에 도망해 새벽에는 안동 땅에 도착하는 등 축지법때문에 잡아낼 수가 없었다.
그러던 어느 날 신동대는 어느 집앞을 지나고 있었는데 때마침 어느 노파가 마당을 비로 쓸면서 호통을 치며 말하기를
"조선에 있는 신동대는 하루 저녁에 수만리를 왔는데 너희들은 아직도 일어나지 않고 뭣들 하느냐"고 고함치는 것이었다.
이 말을 들은 신동대는 놀라 당황했고 자기보다 뛰어난 사람은 이세상에 없노라 하고 오만을 피운 자신의 죄를 뉘우치고는 길을 멈추고 그 노파에게 자신의 부질없는 짓에 용서를 구했다.
그리고 다시 노파에게 "어찌하여 저를 알아 보셨습니까?" 하고 물으니 노파는 대답하기를
"고향으로 돌아가시오. 그리고 장날에 만나는 어떠한 사람과도 이야기를 나누지 마시오"라고 말한 후 안채로 훌쩍 들어가 버렸다.
그리하여 신동대는 고향에 돌아와 다시 의롭게 도술을 써서 임진왜란 때는 왜놈을 무찌르기도 하였다.
그러다 신동대는 깨우쳐 준 노파의 예언을 잊어버리고 어느 날 장날에 우연히 만난 어느 할머니와 얘기를 나누고 말았다.
그러하자 신동대는 그 날 바드리라는 고개에서 넘어오다 죽고 말았다고 한다.
그 뒤 신동대가 살던 동굴에는 어떤 할머니가 들어와서 걸식을 하며 살았는데 어느 날 갑자기 이 동굴 한 모퉁이에서 쌀이 흐르기 시작하였고 쌀은 할머니가 먹을 만큼만 흘러나왔다.
그러자 이 할머니는 욕심이 생겨 쌀이 흐르는 구멍을 크게 넓혔다. 그랬더니 쌀은 영영 흐르지 않고 대신 물이 흐르기 시작했다. 그 뒤 할머니는 예전처럼 고생을 하다가 죽었다고 한다.
★ 백발등에 관한 전설 (인터넷의 글 참조)
임진왜란시 울산지방에서는 의병(義兵)들이 왜군의 앞길을 막고 싸우게 되었다.
그 중 한 곳이 단조성(丹鳥城)이다.
이 단조성은 신불산 정상에서 능선을 따라 영축산으로 이어져 있으며 억새평원을
지나면 성의 흔적을 찾아볼 수 있다.
이 성은 전형적인 산성(山城)으로 적의 침입에 적은 인원으로 방어를 하기가 좋은
천연적인 요새이다.
그러나 왜군은 결국 성의 취약지인 서편에 있는 백발등으로 입성해 성을 결국 함락하게
되었다. 당시 의병들이 흘린 많은 피가 못을 이루었고 단조성 아래의 진풀에는 붉은
이끼가 있어 이는 의병들이 흘린 피 때문이라고 전해져 오고 있다.
영축산에는 억새풀이 많은데 이 억새는 가을이면 백발처럼 흰 빛을 띠기 때문에
이 언덕을 백발등이라 불렸다. 이 지역에는 백발등에 대한 노래가 아직도 전해지고 있다.
“원수로다 원수로다 백발등이 원수로다... ”
청수골산장 뒤에서 좌측 백팔등능선, 중앙 청수좌골, 우측 청수우골 갈림길
시살등에서 장선방향 능선을 내러오다 첫번째(?) 사거리 길에서 좌측으로 신동대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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