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타/진양정씨(스크랩)

[스크랩] 진주정씨관련 유적

깃틸 2016. 12. 17. 14:43

[진주정씨]

구암서원(龜岩書院)-정성근(鄭誠謹) : 전남 광주

도남서원(道南書院)-정경세(鄭經世-愚伏) : 경북 상주

정강서원(鼎岡書院)-정 온(鄭 溫-隅谷) : 경남 진양군 정촌면

도곡서원(道谷書院)-정복주(鄭復周-竹堂) : 경남 함양

퇴곡서원(退谷書院)-정경세(鄭經世-愚伏) : 강원도 강릉

연경서원(硏經書院)-정경세(鄭經世-愚伏) : 경북 대구

고산서원(孤山書院)-정경세(鄭經世-愚伏) : 경북 경산

덕림서원(德林書院)-정경세(鄭經世-愚伏) : 경북 금천

효자문(孝子門)-정재로(鄭在魯-立齋) : 경남 진양군 사봉면 사곡리

청계서원(淸溪書院)-정신렬(鄭臣烈-官亭), 정천익(鄭天益), 정밀(鄭密), 정승윤(鄭承尹-南溪),

정이심(鄭以諶-慕軒) : 경남 진양군 내동면

구암서원(龜岩書院) : 회원구 구암동 284의 19번지에 소재한 구암서원은 철종 9년(1858년)에 구연사(龜淵祠)로 창건되어 고종 원년인 1864년에 서원으로 승격되었으나, 대원군의 서원 철폐령에 의해 폐쇄되었다가 1968년에 문중의 부종사업의 하나로 복원된 것이다. 이 서원의 봉향인물은 세종 때 성균관 대제학과 의정부 찬성사를 역임한 문정공 정이오(文定公 鄭以吾)와 그의 아들 충장공 정본(忠將公 鄭苯) 두 부자이다. 특히, 정분은 단종 때 우의정인 정인지의 매형이었으나 그의 거사 권유에 동조치 않은 지조 높은 충절의 선비로 추앙받고 있는 인물이다.

영연서원(靈淵書院)-정사현(鄭師賢-月潭) : 경북 고령군 고령면

정려(旌閭)-정주신(鄭舟臣), 정백형(鄭百亨), 정광로(鄭光露-狂奴子), 정감(鄭瑊-愼齋)

효열각(孝烈閣)-성산이씨(정규로의 처) : 경남 진양군 사봉면 사곡리

충렬사(忠烈祠)-정분(鄭苯-愛日堂), 정명세(鄭名世), 정명원(鄭名遠-獨谷) : 전남 장흥군 용산면

표산사(杓山祠)-정분(鄭苯-愛日堂), 정감(鄭瑊-愼齋) : 전남 함평군 학교면

세덕사(世德祠)-정분(鄭苯-愛日堂) : 경남 진주시 상봉동

경현사(景賢祠)-정온(鄭溫-隅谷) : 전남 장성군 남면 삼태리

경덕사(景德祠)-정신렬(鄭臣烈-官亭) : 경남 진주시 남성동

황암사(黃岩祠)-정용(鄭庸-中齋) : 경남 거창군 북상면 농산리

행의문(行義門)-정행충(鄭行忠-旅軒) : 전남 함평군 학교면

효자문(孝子門)-정재완(鄭在玩) : 경남 사천군 서포면 무고리

 

 

[기타자료]

관향 진주(晋州)는 고려조 역대 선조들의 세거지다. 진주정씨(晋州鄭氏)는 고려의 개국에 참여한 집안으로 고려조에 이미 수많은 인재를 냈다. 정시양(鄭時陽) 양관대제학(兩館大提學)ㆍ정신열(鄭臣烈) 병부상서(兵部尙書)ㆍ정임덕(鄭任德) 판도판서(版圖判書)ㆍ정유(鄭愈) 예의판서(禮儀判書)ㆍ정홍단(鄭洪旦) 대제학(大提學)ㆍ정수규(鄭守珪) 내부령(內府令)ㆍ정연(鄭椽) 삼사부사(三司副事)ㆍ정천익(鄭天益) (판부사(判府事)ㆍ정을보(鄭乙輔) 찬성사(贊成事)ㆍ정세(통례지후(通禮祗侯)ㆍ정진경(鄭晋卿) 중랑장(中郞將)ㆍ정유(鄭裕) 좌시중(左侍中)ㆍ정균(鄭均 내급사(內給事)ㆍ정손(鄭愻) 종부시승(宗簿寺丞)ㆍ정중소(鄭仲紹) 태자첨사(太子詹事)ㆍ정근(鄭懃) 전교부령(典校副令)ㆍ정석(鄭碩) 평장사(平章事)ㆍ정안사(鄭安社) 동지밀직사사(同知密直司事)ㆍ정수(鄭需) 대제학(大提學)ㆍ정천덕(鄭天德) 부사(府使)ㆍ정신중(鄭臣重) 찬성사(贊成事)ㆍ정신열(鄭臣烈) 병부상서(兵部尙書)ㆍ정현취(鄭玄就) 방어사(防禦使)ㆍ정인덕(鄭仁德) 참판(參判)ㆍ정거중(鄭居中) 문하시중(門下侍中)ㆍ정국유(鄭國孺) 평장사(平章事)ㆍ정길보(鄭吉輔) 선공감정(繕工監正)ㆍ정온(鄭溫) 대사헌(大司憲) 등이 고려의 진주정씨(晋州鄭氏) 얼굴들이다. 이들 중 정천익(鄭天益)은 중국에서 목화씨를 들여온 문익점(文益漸)의 장인으로, 사위와 함께 목화 종자를 재배하고 보급하는데 큰 공적을 남겼다. 정천익(鄭天益)은 공민왕 때 문과에 장원하여 판부사(判府事), 전객령(典客令)을 역임했다. 그의 아들 정문래(鄭文來)는 소사거(繅絲車 물레)와 취자거(取子車)를 통한 제사법(製絲法)을 고안했고, 손자 정문영(鄭文英)은 면포 짜는 법을 개발하는 등 3대에 걸친 연구ㆍ보급으로 후인들이 무명옷과 솜이불 등으로 따뜻하게 지낼 수 있게 하는 데 큰 기여를 했다.

정신열(鄭臣烈)은 현종때 유일(遺逸)로 천거되어 경연(經筵)에서 임금을 모시면서 당시 불교가 지배적인 사회에서 성리학(性理學)을 연구하여 그 보급에 힘썼다. 거란족의 침입 때는 병부상서(兵部尙書)로 토벌에 나서는 등 문ㆍ무를 겸한 인물로 거란 평정의 공으로 금자광록대부 진양부원군(金紫光祿大夫 晋陽府院君)에 봉해졌다. 그 아들 정현취(鄭玄就)는 벙어사(防禦使)로 활약, 지금의 소남(召南-진주(晋州)부근)을 <방어사터>라고 함은 이에 연유한 것이다. 정수규(鄭守珪)는 동국 8현(東國 8賢)의 한 사람으로 유명한 안향(安珦)의 사위이고, 정을보(鄭乙輔)는 충숙왕 때 국사시(國士試)에 장원으로 합격 당대의 문장으로 명성을 떨치면서 충혜왕 때 정당문학(政堂文學)에 오른 뒤 청천군(菁川君)에 봉해졌고 공민왕 때는 찬성사(贊成事)에 이르렀다. 고려 말 창왕 때 대사간(大司諫)을 지낸 정온(鄭溫)은 고려가 망하자 ‘충신불사이군(忠臣不事二君)’의 충절로 가문의 절의를 지켰다. 그는 당시 이성계(李成桂)일파의 쿠데타로 정계가 혼돈 시에 소경을 가장하고 지리산 청학동(智異山 靑鶴洞)에 은거했다. 조선개국 후 왕위에 오른 이성계(李成桂)가 벼슬을 내렸으나 거절하고, 어지러운 세상을 보지 않겠다고 끝내 장님 행세를 했다. 이에 세상 사람들이 그의 충절을 <포은(圃隱)의 死(정몽주(鄭夢周)의 죽음)>, <야은(冶隱)의 거(去) (길재(吉再)의 은거)>에 비겨 <우곡(隅谷)의 맹(盲) (정온(鄭溫)의 눈멈)>이라고 칭송했다고 한다. 진주정씨(晋州鄭氏)는 조선개국 후에도 탄탄한 인맥을 형성했다. ‘고려사’를 편찬한 정이오(鄭以五)와 그의 아들 정분(鄭苯), 그리고 정척(鄭陟) 등은 조선 초기의 대표적 인물들이다. 정이오(鄭以吾)는 자(字)가 수가(粹可)요, 호(號)가 교은(郊隱)으로 고려 공민왕 때 문과에 급제하고 조선 태종 때 ‘태조실록(太祖實錄)’의 수찬(修撰)에 참여 했으며, 검교판한성부사(檢校判漢城府事), 승문원제조(承文院提調), 예문관대제학(藝文館大提學)을 거쳐 찬성(贊成)에 이르렀다. 특히 그의 문장은 당대를 풍미했으며, 시를 잘 지어 진주(晋州)의 촉석루에 친필시가 현판으로 새겨져 걸려 있으며, 저서로‘교은집(郊隱集)’, ‘화약고기(火藥庫記)’ 등을 남겼다. 경남 창원(昌原)의 구암서원(龜岩書院)에 제향(祭享)되었다. 정분(鄭苯)은 수양대군(首陽大君)의 왕위 찬탈에 저항하다 숨진 단종조의 명신이다. 문종은 어린 세자(단종)를 남겨 놓고 숨을 거두면서 황보인(皇甫仁), 김종서(金宗瑞) 등 두 정승과 정분(鄭苯 당시 좌찬성(左贊成))에게 단종을 잘 보필하라고 명했다. 그 후 정분(鄭苯)은 우의정에 오르고 전라(全羅)ㆍ충청(忠淸)ㆍ경상도(慶尙道)의 도체찰사(都體察使)가 되어 지방 순시에 나섰다. 이때(1453년) 이른바 계유정난(癸酉靖難)이 일어나 황보(皇甫), 김(金) 두 정승은 수양대군 일파에 죽음을 당하고 정분(鄭苯)은 처음에는 낙안(樂安)으로, 이어 광양(光陽)으로 유배되었다가 그곳에서 교수형을 받았다. 공주(公州) 요당서원(憀堂書院)에 향사되었다. 그는 당시 수양의 측근이었던 정인지(鄭麟趾)는 수양대군 옹립 모의를 하면서 “천하의 인심이 수양대군에게 기울고 있는데 형님의 생각은 어떠신지요”라는 내용의 서신을 정분(鄭苯)에게 띄워 은근히 그의 협조를 청했다. 그러나 그는 ‘충신불사이군(忠臣不事二君)’이라는 한마디로 이를 거절 했다고 한다. 전하는 말에 따르면 그는 귀양지에 있는 동안에도 늘 조상의 신주(神主)를 받들어 제사를 지냈는데, 하루 저녁은 자다가 일어나서 수행하는 중에게 밥을 짓게 하여 조상에게 제사를 지낸 뒤에 신주를 불태워 버렸다. 그리고 조금 뒤에 서울로부터 관원이 내려와 형을 집행했다고 한다. 시호는 충장(忠莊)이며 그의 충절을 기리는 불조묘(不祧廟)가 충남 공주군 사곡면 호계리(公州郡 寺谷面 虎溪里)에 있다. 세조~성종조의 청백리요, 명필로 이름을 떨쳤던 정척(鄭陟)의 가문은 <효(孝)>로서 문중을 빛냈다. 정척(鄭陟)은 태종 때 무년문과(武年文科)에 급제한 뒤 교서관정자(校書館正字), 감찰(監察), 예조정랑(禮曹正郞), 지승문원사(知承文院事) 등을 거쳐 세종 때 첨지중추원사(僉知中樞院事)가 되었으며, 이후 공조(工曹)ㆍ호조(戶曹)ㆍ예조(禮曹)의 참의(參議), 예조참판(禮曹參判), 판한성부사(判漢城府事) 등을 거쳐 단종 때 충청도관찰사(忠淸道觀察使)가 되었다. 세종 때 지중추원사(知中樞院事) 등을 거쳐 성종 때는 수문전대제학(修文殿大提學)에 올랐으며, 서예, 특히 해서(楷書)에 능해서 옥쇄와 관인의 글자를 거의 그가 썼다. 양성지(梁誠之)와 함께 1463년 ‘동국지도(東國地圖)’를 찬진(撰進)했고, 현재 종묘 안에 있는 장생전(長生殿)은 유비무환(有備無患)의 정신을 일깨우기 위해 그가 국왕에게 건의, 건립된 것으로 알려졌다. 정지산(鄭之産)의 호는 포옹(逋翁), 호조정랑(戶曹正郞)을 지냈다. 계유정난(癸酉靖難)에 아버지 충장공(忠莊公)이 화를 입자 김시습(金時習) 등과 공주 동학사(公州 同鶴寺)에 초혼각(招魂閣)을 세웠고 단종을 위해 3년동안 복상(服喪)하는 충절을 지켰다고 한다. 고종 때 내부대신(內部大臣)에 추증되고 충효정려(忠孝旌閭)가 내려졌으며, 공주 요당서원(公州 蓼堂書院)에 향사되었다. 성종 때의 청백리요, 유명한 효자였던 정성근 충절공은 정척의 아들이다. 성종 때 문과에 급제하여 전적(典籍), 지평(持平), 해주목사(海州牧使) 등을 지내고 승지(承旨), 직제학(直提學)을 역임했는데, 성종이 세상을 뜨자 연산군(燕山君)의 폭정 속에서도 홀로 3년간 수묘관(守墓官)을 치렀다. 당시 연산군은 전군에 단상법(短喪法) 시행을 명령했으나, 정성근(鄭誠謹)은 이를 거부하고 성종에게 충절을 바쳤던 것이다. 이 소식을 듣고 대노한 연산군은 갑자사화 때 그를 처형했다. 그 후 중종반정(中宗反正)으로 이조판서(이조판서)에 추증되고, 충신정문(忠臣旌門)이 내려졌다. 그의 아들 정주신(鄭舟臣 承文院博士)은 아버지가 억울하게 효수되자 이를 애통하게 여기고 식음을 전폐, 끝내 굶어죽었다. 뒤에 조정에서 정문(旌門)을 세워 그의 효행을 표창하였다. 정성근(鄭誠謹)의 일가는 대대로 효행으로 이름나, 정주신(鄭舟臣)의 아우 정매신(鄭梅臣 중종조ㆍ판관(判官)ㆍ청백리(淸白吏)), 정매신(鄭梅臣)의 아들 정원서(鄭元瑞), 주신(舟臣) 아들 정원린(鄭元麟), 정원린(鄭元麟)의 아들 정효성(鄭孝成 관찰사(觀察使))등이 모두 효자로 가문을 빛냈다.

정효성(鄭孝成)의 아들 정백창(鄭百昌)은 광해군 때 문과에 급제한 뒤 사관(史官)으로 있으면서 당시 실권을 잡고 있던 대북(大北) 일파의 비행을 사초(史草)에 올렸다가 파직당하는 수난을 겪기도 했으며, 인조반정(仁祖反正)으로 복직된 뒤 부수찬(副修撰)ㆍ교리(校理)ㆍ사간(司諫)ㆍ사가독서(賜暇讀書)ㆍ예조참의(禮曹參議)ㆍ대사간(大司諫)ㆍ이조참판(吏曹參判) 등을 가쳐 도승지(都承旨)ㆍ경기도 관찰사(京畿道 觀察使)에 이르는 등 이름을 청사에 빛냈으며, ‘현곡집(玄谷集)’을 남겼다. 또 정백창(鄭百昌) 충경공(忠景公)은 인조 때 문과에 급제하여 세자시강원 필선(世子侍講院 弼善), 봉교(奉敎) 등을 지내고 원종(인조의 아버지) 추존을 반대하다가 한때 관직에서 밀려나기도 했으나, 곧 복직되어 이조정랑(吏曹正郞), 장령(掌令)을 지냈으며 병자호란(丙子胡亂 1636년)이 일어나자, 강화도(江華島)에 들어갔다가 섬이 함락되어 자결하고 말았다. 그 이듬해 충신정문(忠臣旌門)이 세워져 충절이 후세에 전해지고 있다. 진주정씨(晋州鄭氏) 가문이 낳은 대표적인 학자로 우복 정경세(愚伏 鄭經世)가 있다. 서애 유성룡(西涯 柳成龍)의 수제자인 그는 당대의 뛰어난 성리학자로, 사계 김장생(沙溪 金長生)과 함께 예학파(禮學派)를 형성한 인물이다. 나이 스물셋에 문과에 급제하고 호당(湖當)에 뽑혔으며, 승문원부정자(承文院 副正字), 검열(檢閱), 사가독서(賜暇讀書) 등을 거친 후 1592년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의병을 모집하여 공을 세우기도 하였다. 그 뒤 수찬(修撰)ㆍ정언(正言)ㆍ교리(校理)ㆍ사간(司諫) 등을 역임했으나, 광해군 때 권신 정인홍(鄭仁弘)과 사이가 좋지 않아 삭직되기도 했다. 인조반정후 부제학(副提學)에 발탁되고 전라도관찰사(全羅道觀察使), 대사헌(大司憲)을 거쳐 이조판서(吏曹判書)겸 대제학(大提學)에 이르렀다. 찬성(贊成)에 추증되었다. 상주(尙州)의 도남서원(道南書院), 대구(大邱)의 연경서원(硏經書院), 경산(慶山)의 고산서원(孤山書院), 개령(開寧)의 덕림서원(德林書院) 등에 제향됐고, 저서로 ‘우복집(愚伏集)’, ‘상례참고(喪禮參考)’ ‘주문작해(朱文酌解)’ 등을 남겼다. 임진왜란의 명장 정기룡(鄭起龍)장군도 배놓을 수 없다. 그는 임진왜란 당시 상주성(尙州城) 탈환전투, 정유재란 때의 성주(星州)ㆍ협천(陜川)ㆍ초계(草溪)ㆍ의령성(宜寧城) 탈환 전투에서 눈부신 전공을 세웠다. 광해군 9년 삼도통제사(三道統制使) 겸 경상우도수군절제사(慶尙右道水軍節制使)가 되어 남해안을 방어하다 통영(統營) 진중에서 숨졌다. 그는 곤양(昆陽) 출신이어서 일부 문헌에는 곤양정씨(昆陽鄭氏)의 시조로 전해지고 있다. 정명세(鄭名世) 해미현감(海美縣監-임진왜란 공신), 정감(鄭瑊-학자ㆍ의무원종(宜武原從 일등공신), 정사제(임진왜란 공신ㆍ부수찬(副修撰)에 추증), 정귀세(鄭貴世) 봉사(奉事) 등도 임진왜란 당시 구국의 전장에서 순절했다. 뿐만 아니라 정천향(鄭天鄕) 참판(參判), 정원향(鄭元鄕) 군수(郡守), 정승서(鄭承緖) 중추부사(中樞府事), 정약(鄭若) 감찰(監察), 정설(鄭說) 병마절제사(兵馬節制使)도 임진 원종공신(原從功臣)으로 빼놓을 수 없는 인물들이다. 이 밖에 조선조의 인물로는 인조(仁祖)때 문과 급제하여 효종(孝宗)때 감찰(監察), 예조좌랑(禮曹佐郞), 첨지중중추부사(僉知中樞府事)에 이른 정필달(鄭必達), 효행이 뛰어나 나라에서 관직을 주었으나 나아가지 않고 학문에 정진하여 고령 5현(高靈 5賢)의 하나로 꼽힌 정사현(鄭師賢), 성리학(性理學)에 밝았고 ‘입재집(立齋集)’이란 저서를 남긴 정종로(鄭宗魯) 등을 꼽을 수 있다. 정희면(鄭熙冕), 정도희(鄭燾希)ㆍ도홍(燾洪)형제 등은 일본이 조선을 병탄하던 당시 항일투쟁에 나선 인물들이다. 정희면(鄭熙冕)은 원래 성리학에 능한 학자이나, 1905년 을사(乙巳)조약이 체결되자 곳곳에 격문을 보내 의병을 모아 1907년 영광(靈光)에서 왜적과 싸우는 등 항일운동을 벌였으며, 도희(燾希)형제는 선동(船洞), 철천(鐵川) 등지에서 왜병을 무찌르는 공훈을 세웠다.

[경주정씨]

1. 육촌장묘(六村長廟)-지백호(智伯虎) : 경북 경주시 황오동

2. 낙안서원(樂安書院)-정 발(鄭 撥) : 부산직할시

3. 문봉서원(文峰書院)-정지운(鄭之雲-秋巒) : 경기도 고양시

4. 옥계서원(玉溪書院)-정승복(鄭承復-玉溪) : 전남 순천시 옥천동

5. 충장사(忠壯祠)-정임형(鄭林亨-星石齋) : 전남 화순군 이서면 서리

 

[동래정씨]

1. 노덕서사(老德書祠)-정홍익(鄭弘翼) : 함남 북청군

2. 덕천향사(德川鄕祠)-정응창(鄭應昌) : 충북 문의군

3. 완담향사(浣潭鄕祠)-정귀령(鄭龜齡), 정옹(鄭雍), 정사(鄭賜), 정환(鄭渙), 정난종(鄭蘭宗-

虛白堂), 정영후(鄭榮後), 정영방(鄭榮邦-石門) : 경북 용궁군

4. 소양사(瀟陽祠)-정언신(鄭彦信-懶庵) : 경북 문경군

5. 충렬사(忠烈祠)-정기원(鄭期遠-見山) : 전북 남원군

6. 봉암사(鳳岩祠)-정홍익(鄭弘翼-休翁) : 전남 진도군

7. 정충사(靖忠祠)-정유문(鄭惟文-杏村) : 경남 안의군

8. 영빈사(瀅濱祠)-정시수(鄭時修-琴村) :

9. 창렬사(彰烈祠)-정견룡(鄭見龍) : 함남 함흥군

10. 표절사(表節祠)-정대업(鄭大業) :

11. 형산사(刑山祠)-정홍석(鄭弘錫-雲溪) :

12. 숭현서원(崇賢書院)-정굉필(鄭光弼-守夫): 함남 함흥

13. 종산서원(鍾山書院)-정홍익(鄭弘翼-休翁): 함북 종성

14. 금암서원(琴岩書院)-정광천(鄭光天-洛涯), 정사철(鄭師哲-林下) : 대구

15. 정 려(旌閭)-정기일(鄭琦一)

16. 영빈원(瀅濱院)-정응두(鄭應斗)

17. 옥동원(玉洞院)-정언굉(鄭彦宏-西溪) : 함남 함흥

18. 학천원(鶴川院)-정수홍(鄭守弘-楓川) : 전북 완주

19. 소로원(小魯院)-정호인(鄭好仁-蘇山), 정호의(鄭好義) : 경남 양산

20. 현종묘(顯宗廟)-정태화(鄭太和-陽坡) :

21. 성종묘(成宗廟)-정창손(鄭昌孫)

22. 중종묘(中宗廟)-정광필(鄭光弼-守夫)

 

출처 : 심온세상
글쓴이 : 심온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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