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타/진양정씨(스크랩)

금오산 정기룡 장군 사당 경충사

깃틸 2010. 6. 6. 18:29

 

  경충사

 

 "있는 것은 없는 것이요, 없는 것은 있는 것이다.(色卽是空·空卽是色)남은 것은 오직 고요, 고요 속에 머물게 됩니다.

중방衆芳은 "많은 꽃(=온갖 꽃,많은 향기로운 꽃)"을 의미하는데 "賢臣(현신)들이 많음을 비유"
하기도 합니다.그러므로 중방동문은 "많은 꽃이 있는 마을로 들어가는 문"이라는 의미입니다.
혹은 "賢臣이 있는 마을로 들어가는 문"이라는 의미도 되겠지요.입구부터 예사롭지 않습니다.
현신賢臣이라면 정기룡장군을 의미하는 지 모르겠습니다.바로 정기룡 장군을 모신 사당인
경충사가 나옵니다.

정기룡 장군은 임진왜란 육군의 명장입니다.60여회 전투에서 전승을 거둔 명장입니다.
요즘 같으면 게릴라식 특전부대의 장군으로 보면 되겠습니다.전쟁영웅이지만 이름이
상대적으로 덜 알려진 이유는 선조임금이 7년이 지난 후 슬그머니 선무 1등공신에 올렸기
때문입니다.30대 젊은 나이에 삼도수군통제사를 지낸 정기룡이 두려웠는지 모릅니다.
이곳 주위 산야에 부친의 묘소가 있고,첫째부인 진주 강씨(진주성 정복시 남강에 투신 자결함)
의 의대묘가 있습니다.

수군에 이순신이 있었다면 육군에는 정기룡이 있었다라는 찬사가 하나도 아깝지 않은 인물
입니다.권율과 김시민이 방어에만 치중했다면,개인의 무력과 지략으로 싸운 사람은
곽재우와 정기룡인데 정기룡은 가히 전설적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1617년 삼도수군통제사 겸 경상우도병마절도사를 지냈습니다. 특히 포로로 잡힌 상관을
구하기 위해 필마단기로 그를 구한 그의 용맹을 일컬어 조선의 조자룡이라고까지 찬사를
아끼지 않았습니다.임진왜란의 공로를 평가한다면 이순신 다음으로 정기룡이랄 수 있습니다.
정기룡에 대한 재평가가 실로 아쉬운 부분입니다. 거북선을 만든 나대용이나 북관대첩의 큰공을
세우고도 사력을 다해 피하고자 했던 시기와 질시로부터
끝내 자유롭지 못해 결국 그가 창원부사 때 지은 초회왕(楚懷王)의 시가 인조를 빗댄 것이라는
죄로 60세에 고문사 당한 정문부에 대한 평가도 너무 소홀하지만
어찌 정기룡장군에 대한 평가는 이렇게도 박할까요.논개 보다도 못한 평가라니...
경충사(景忠祀)가 있는 이곳,경남 하동군 금남면 진교리 금오산(849m) 기슭은 정기룡鄭起龍
장군의 태지(胎址)이기도 합니다.그의 호는 윤봉길과 같은 매헌(梅軒)이며 자는 경운(景雲)인데
실로 조선의 상서로운 빛,경운[景雲=서운(瑞雲])이었습니다.

이곳에서도 "있는 것은 없는 것이요,없는 것은 있는 것이다色卽是空·空卽是色"를 여기서도
느낍니다.남은 것은 오직 고요, 고요 속에 머물게 됩니다.두손 모아 충심으로 예경하고
뭔가 제가 할 수 없는 대한민국 못난 후손 중에 한명임을 자각하게 됩니다.

 

상선약수(上善若水),“최고의 선은 물과 같나니, 물은 만물을 이롭게 해주면서도 다투지 않으며
사람들이 싫어하는 곳에 머문다.”물은 미세한 틈 사이로 스며들어 만물을 키우고,
어떤 고정관념도 없이 흐르고 또 흐릅니다.